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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카니발 조회 7회 작성일 2022-04-03 13:08:3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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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D역사스페셜 – 조선의 수도 한성은 어떻게 건설됐나?

- 한성 성곽의 모습을 찾아 나서다
조선시대 한성을 둘러싼 성곽의 길이는 총 18Km.
하지만 상당수의 성곽은 무차별적인 도시개발을 비껴가지 못했다.
사라진 성곽의 흔적을 찾아 나선 제작진은 위성사진을 이용해 성곽의 위치를 확인하고 복원해 보았다.

- 성곽 축조의 비밀, 공사 실명제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기술의 발달이 없었던 600년 전, 무려 18Km에 달하는 성곽 축조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제작진은 성곽에 새겨진 각자를 탁본해 본 결과,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성곽 축조를 위해 한성으로 모여든 장정들!
공사실명제라는 합리적인 방법을 동원해 성곽을 축조한 조상들의 지혜를 따라가 본다.

- 수도 결정을 위해
일일이 수도 후보지를 답사했던 태조 이성계는 즉위 두 달 만에 한양 천도를 결심한다.
조선은 왜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해야만 했을까?
국토의 중심에 위치하며 조운과 교통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방어에도 적합한 한성은 조선왕조 600년간 명실상부한 수도로 자리매김한다!

- 개경의 시전을 폐쇄하라!
천도는 개국공신과 부유한 상인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이들의 저항은 태종대에 이르러서도 계속되는데.. 마침내 개경의 시전을 금지시키는 태조!!
천도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사회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던 때, 왕들은 어떻게 한양 천도를 추진할 수 있었는가.

- 자금성 VS 경복궁
수도건설에 있어 가장 상징적이고 핵심적인 건물이 바로 궁궐과 종묘·사직이다.
고려의 황성과 조선의 궁궐은 어떠한 유사점이 있을까?
반듯반듯한 중국의 자금성과는 달리 자연지세를 이용해 축조한 한성은 도성을 지을 때 지켜야 할 기본 원리를 제시한 주례고공기의 규범이 적용됐다.
한성을 통해 실용적인 시각과 함께,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중시했던 조상들의 생각을 들여다본다.

HD역사스페셜 44회 조선의 수도 한성은 어떻게 건설됐나 (2006.4.21.방송)
http://history.kbs.co.kr/
Jung a Son : 복원에 애써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걸을수록 자부심이 생기는 한성 성곽길. 제가 요즘 걷는 중인데 정말 아름답습니다.
Ohtak Kwon : 고정기용선생님 모습 오랜만에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차동희 : 20007년의 방송분인데 이제 유튜브에 올라온거네요
홍순민교수가 엄청 젊었네요 ㅎ
한양도성이 아직 제대로 연구되지 않아서 오류가 많네요.
궁궐보다 종묘와 사직이 먼저 건설되었는데요
한도얼(한양도성얼굴) : 한양도성 37회 순성하며 역사를 탐방 중입니다. 좋은방송 감사 합니다
이영석 : 영덕 쪽이랑 맞닿는지는 모르겠지만 포항 에 흥해 라는 지역 있습니다 .( 물론 포항에 연일 이란 지명도 아직 존재 합니다 )

KBS 역사스페셜 – 대가야 최후의 왕자 월광은 어디로 갔나 / KBS 20010421 방송

◼︎ 대가야의 마지막 왕자, 월광은 어디로 갔나
신라 패망후 금강산에 들어가 풀뿌리를 연명하며 살았던 마의 태자가 신라의 마지막 왕자라면 대가야 패망 후 가야산에서 말년을 보냈던 월광태자는 대가야의 마지막 왕자이다 그 월광태자의 대가야는 과연 어떤 나라였을까?
몇 개의 작은 나라들이 연맹체를 이루고 있던 가야사에서 김수로왕의 금관가야와 함께 강성했던 나라 대가야. 6가야 중 금관가야가 전기의 맹주였다면 대가야는 후기의 맹주로서 위세를 떨쳤다. 그동안 기록된 것이 거의 없어 잘 알려진 바는 없지만 계속되는 대가야 유물의 발굴로 하나씩 그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지난 1997년 고령의 지산동 고분에서는 놀랄 한만 발굴이 이뤄졌다.
그것은 바로 대가야의 고령 지산동 44호분의 발굴이다.
대가야가 대단한 세력을 가진 고대왕국이었음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35구의 유골이 발견된 것이다. 그 유골들은 금제품을 착용한 상태로 발굴되어 순장된 주인공들이 꽤 높은 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강력한 왕권중심사회로 발전하던 대가야는 6세기 중엽 신라에 멸망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데... 그 후 월광태자는 가야산 자락에 절을 짓고 그 한 켠에서 승려로 쓸쓸한 말년을 보낸다. 왜 월광은 대가야 마지막 왕자에서 승려로 여생을 보냈던 것일까?
역사스페셜에서는 진흥왕 순수비, 단양적성비, 해인사 등 아직도 남아있는 월광태자의 자취를 추적, 분석해 소설 같은 그의 행적을 알아본다. 또한 이를 축으로 신라에 투항한 김해의 금관가야와는 달리 끝까지 맞서싸운 대가야의 실체와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대가야 왕족의 후예들에 대해 집중조명한다.

◼︎ 지산동 고분(44호분)에서 발견된 35구 유골의 비밀
경북 고령의 지산동은 고분이 밀집되있는 지역이다. 그 가운데 44호분은 외형의 직경이 25~27미터, 높이가 6미터에 달하는 봉토분이다. 금제품을 착용한 35구의 인골이 발견됐다. 현재까지 발굴된 순장무덤중 최대 규모로 대가야가 강력한 중앙집권사회였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단서다. 우륵의 가야금, 갑옷·환두대도를 제작했던 철의 왕국으로서 기억되는 대가야의 고령 지산동 44호분을 통해 대가야의 역사는 새롭게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 추적! 가야산 해인사에 깃든 대가야 창건설화
지금도 가야산의 해인사 안에는 대가야의 시조신을 모신 사당인 정견천왕사가있다. 정견은 가야의 산신인데 동국여지증람에 보면 대가야의 유래를 알 수 있다.
가야산신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하지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대가야왕 뇌질주일과 금관국 뇌질청예였으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다.
즉 가야산신과 천신사이의 아들이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이고 가야산은 대가야의 신이 살고 있는 성산이란 것이다. 그로부터 500여 년 후 대가야의 마지막 태자 월광은 불교에 입문하고 가야산의 월광사에서 불운한 말년을 보낸다.

◼︎ 비운의 마지막 왕자, 월광의 역사는 대가야의 역사
역사는 강자의 편이다. 신라에 의해 패배의 역사를 가진 대가야는 그런 이유로 체계적으로 정리된 왕의 계보가 없다. 단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등에 단편적으로 보이는 왕명(王名)으로 취재진은 대가야왕의 계보를 조심스럽게 복원해볼 수 있었다. 결과 월광의 모계는 신라인이었음이 밝혀졌는데.. 대가야와 신라의 결혼동맹으로 월광태자의 계보가 만들어졌는데 거슬러 올라가면 대가야국 월광은 가야시조인 산신 정견의 10대손이며 아버지는 이뇌왕으로 신라에 구혼하여 이지배의 딸을 맞아 태자를 낳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가야 마지막 태자 월광이 마지막 왕 도설지임을 알려준다. 월광 어머니의 나라 신라는 대가야 복속을 위해 공격한다. 내부의 친백제 세력과의 정치적 혼란으로 월광은 신라로 망명하며 그 이름은 단양적성비에도 보인다. 그 후 정치적 목적으로 맺은 백제와 신라의 결혼동맹은 관산성 전투를 마지막으로 모두 깨지고 만다.

◼︎ 대가야 최후의 전투, 관산성 전투 그 후의 이야기
554년 백제와의 동맹으로 대가야는 오랜 동맹관계에 있었던 신라와 마지막 대접전을 펼친다. 그러나 그 결과는 대가야와 백제의 대패로 났으며 대가야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그 후 사다함을 필두로 가야토벌에 나선 신라의 보복은 대가야 일대에 피바람을 일으켰고 결국 대가야는 최후를 맞는다. 그 후 민심수습을 위해 대가야의 허수아비 왕으로 월광을 세운다.
대가야 마지막 왕 월광는 결국 대가야의 근원인 가야산에 조그만 절을 짓고 승려로 쓸쓸한 여생을 보낸다. 그와 더불어 패배한 나라 대가야도 잊혀졌다.
대가야 마지막 왕자 월광을 통해서 오랜 침묵을 지켰던 고대왕국 대가야의 참모습을 알아본다.

역사스페셜 113회 – 대가야 최후의 왕자 월광은 어디로 갔나 (2001.4.21.방송)
http://history.kbs.co.kr/
우머나이저 : 꿀잠 자게 해줘서 감사 합니다.
둔내터널 : 3:44 제가 역사스페셜 책 가지고 있는데 그 책에서 국사단 내부의 그림의 주인공이 누군지 분명치 않다고 소개하고 있지만 아마도 월광태자 아닐까요..
juok Han : 어쩌면, 천여개의 무덤을 조성한 것은 하늘에 감응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그 무덤조성의 모양은 어떤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예전에 신라 무덤의 발굴 시 갑자기 천둥번개 치고 비가 세차게 쏟아졌었다는 발굴자의 증언이 있는 다큐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도 피장자의 어떤 요소가(그의 몸의 요소, 그 속에 들어 있는 어떤 것의 요소, 그곳에 마음을 묻은 약 2천년전 어떤이들의 요소) 하늘과의 감응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비정한세상 : 개처량한 세상.. 피 맺히는 음악..
9탁현 : 요즘 유튜브는 볼만한게없음 역사스페셜다시보니 겁나재밋네!!!

KBS 역사스페셜 – 한국전쟁 최대의 미스터리, 북한군은 왜 3일간 서울에서 머물렀나 / KBS 1999.6.26. 방송

1950년 6월25일 남침한 북한군은 단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다.
그러나 당시 한강 이북을 점령한 북한군은 계속 남으로 진격하지 않고 3일간을 서울에 머문다. 한국전쟁 최대의 미스터리로 불리는 이 3일에 대한 의문을 풀어보고, 북한군의 선제공격을 막았던 춘천전투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역사스페셜 33회 – 한국전쟁 최대의 미스터리, 북한군은 왜 3일 간 서울에서
머물렀나 (1999.6.26.방송) http://history.kbs.co.kr/
소림사불꽁 : 있어서는 안될 전쟁이지만 정말 대한민국 이라는 나라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모든 국군 장병님들의 삼가 고인 명복을 빕니다.
kyspol78 : 어릴 때는 6.25에 각종 영화, 다큐멘터리 등을 해주었는데 요즘은 그런 프로가 거의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역사는 없어지지 아니하는 현재의 교훈인데 시대상을 반영하는 모양입니다..
설튜브 : 자신의 목슴과 몸을 희생하시며 우리나라를 지켜주신 전쟁영웅분들덕에 이렇게 시원하고 따뜻한 방에서 살 수 있어 너무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절때 잊지 않겠습니다
민기무 : 저희 아버지가 6사단소속으로 참전하셧죠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다시한번 아버지의 희생에 머리숙여 집니다. 그립습니다 아버지.
정은기 : 6.25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언제 어디서 전쟁이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나라을위해 목숨걸고 싸워주신 참전용사 모든분들게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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